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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조가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는?
-이건 좀 복잡하게 설명이 될 수도 있는데 그나마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영조는 그 당시 붕당의 한 일파인 노론의 힘에 의해서 즉위하게됩니다.

  그래서 사림들의 대립을 막기위해 완론탕평을 펼침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는 노론에 의해 휘둘리는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죠.

  그런 상황에서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대신 정치를 경험해보는 것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을 시키는데 그 당시 주도세력인 노론은 이것을 반대하면서 영조에게 좋지 않은 말들만 하게되고 그로 인해서 영조와 사도세자사이의 불화가 조장됩니다.

 이런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게되고 죽게되는데 이 것을 '임오화변'이라고 합니다.

 영조가 그 때쯤 치매가 걸려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까먹어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 사도 세자가 한 일은? 
 -왕이 되지는 않았으니 업적은 없습니다. 굳이 꼽자면 대리청정을 맡았고 노론에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 입니다.
3. 영조가 한 일은?
 -영조의 업적은 꽤 많은편입니다.

 일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노론에 의해 왕위에 즉위했고, 완론탕평을 펼치게됩니다. 이 시기는 조선 후기 '사림'세력이 집권하던 시기로 붕당정치시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들이 싸우듯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시비가 말할 수 없이 많고 컸던 시기이고 이 것을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 완론탕평입니다. 그래서 즉위 직후에 '탕평교서'를 발표하여 정쟁을 못하게 하지만 결과는 정치적 언론이 위축됩니다.

 이 시기에 노론이 집권했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 것에 반발한 소론의 강경파와 일부 남인이 연합하여 영조의 '경조 독살설'을 명분으로 영조를 부정하고 난을 일으키는데 이 사건을 '이인좌의 난'이라고 합니다.

그 외의 업적은 산림(사림 세력들이 학문적으로 떠받드는 우상 같은것으로 생각하시면됩니다.)의 존재부정, 서원(사림세력의 지방 근거지)정리, 이조 전랑의 권한 약화(인사권이 강한 직책이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균역법(군포 납부를 2필에서 1필로줄임)시행, 청계천 준천사업(범람억제목적), 노비종모법(양민과 천민이 결혼했을때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게 하는 제도), 속대전(법전)편찬, 신문고제도 부활(태종 때 시작해서 연산군이 폐지함), 탕평비건립 등이 있습니다.

 
4. 사도 세자가 죽은 나이와 연도는?

- 1762년 인데 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겠네요.

5. 사도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나요?

-네 확실히 후회했다고 사료에도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붙은 시호인 '사도세자'도 영조가 내린것입니다.


6. 사도 세자의 부인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도세자의 부인은 '혜경궁 홍씨'로 사도세자와 동갑내기이며, 당연히 정조의 어머니입니다.

 당연히 정조가 왕위에 즉위했을 때 정권에서 힘을 얻게되며, 정조가 죽은 후 '한중록'을 집필합니다.


7. 영조의 부인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도세자의 어머니를 물어보시는것같은데

<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이다.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여 후사()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당하는 와중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1764년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고, 이듬해 시호로 의열()을 추증하면서 친히 선시지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빈이씨 [暎嬪李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8. 영조의 세손(정조) 에 대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사도 세자와 영조의 싸움 사이에 끼어서ㅜㅜ
-정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어려서 정신적 충격이 컸겠죠. 그래서 왕위에 즉위했을 때 할아버지인 영조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탕평책을 펼쳐서 사림들이 더이상 활개치지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친위부대도 설치하고, 수원에 화성을 설치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는 등의 일을 하면서 정치세력들을 아주 잘 컨트롤한 개혁적이고 현명한 왕입니다.


9. 영조는 어떤 성격이었죠?
-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상당히 개혁적인 왕이었으나, 자신을 즉위시켜준 노론파를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에 부딪히게됩니다. 그렇다고 무능력한 왕이나 소심한 왕은 절대 아닙니다.


10. 사도 세자는 어떤 성격이었죠?
- 성격을 물어보신다는게 상당히 애매한데, 드라마에 나오는 것들은 전부다 해석하기 나름이라 그런것들 만 믿고 역사적 인물을 아 저 사람이 저런 성격이구나 하고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연기자의 연기력이나 성향에 따라서 그 인물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는 천차 만별입니다.


11. 정조의 성격과 한 일은?
- 개혁적이고 아주 똑똑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신 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탕평책을 펴렸으며,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과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초월적인 왕으로 군림한다고 할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친 왕이었습니다. 몇 세기동안 정치판을 장악해온 사림들을 억누를정도로 대단한 인물임을 보면서 알 수 있죠. 특히 규장각을 설치해서 서얼출신이나 남인 출신들을 등용해 왕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했으며(박제가,유득공,정약용), 초계문신제라는 제도를 통해 신하들을 양성,교육하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또한 법전인 '대전통편'과 외교서적인 '동문휘고' 정부기관의 기능을 서술한 '택지지, 추관지'등을 편찬하게했으며 특히 무예실력도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기록되어있고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슈퍼스타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232604341&qb=7IKs64+E&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1&pid=SQAG1woRR1ossbPNfxhsssssstG-308217&sid=l0CDUhrUkImccgu%2BPwCVTg%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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